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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즐기기/브란덴부르거문 말고도

베를린의 피에타.

시간이 너무 잘 갑니다.
8월에 일 좀 해놓고 한국에 가려고 했는데,
안되겠습니다. ㅎㅎ
괜히 스트레스 받느니,
상큼하게 한국가서 죽도록 일 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 

오늘은 오랜만에 동쪽으로  대중교퉁수단을 이용해서 나갔습니다.
보통 걸어다니는 구역내에 저의 대부분의 필요조건을 갖추고 사는지라, 
공연 볼 때와 손님 왔을 때가 아니면 잘 안 나가는데,
오늘은  이런, 저런 전시도 좀 보고,
간만에 관광객들 득실거리는 거리도 좀 볼까 싶어 나갔더랬습니다.

                                                                                   피에타가 있는 Neue Wache, 훔볼트 대학 바로 옆에 있습니다. ^^

피에타..
라고 하면,
보통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를 엄마이신 마리아님이 끌어안고
비탄에 잠긴 장면을
화면 또는 조각으로 옮겨 놓은 예술의 주제를 말합니다.
14세기에 독일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물론  주제의 특성 상 금방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되었지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피에타는
아마도 바티칸에 있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피에타 이겠는데요.
미켈란젤로의 작품 말입니다.^^
물론 제일 아름답다고 말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늘 불현듯 생각이 나서, 제가 만나고 온 베를린의 피에타는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피에타 입니다.

                                                                                                        아래의 글귀는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독일의 여류작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으로
그녀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농민들과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기록한 석판화와 그림들로 유명합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도  봉건사회의 농노제도같은 것이 남아있어
농민들의 생활은 궁핍하기 이를데 없었고,
산업화에 따른 노동력의 착취등으로 도시 공장 노동자의 삶도 형편없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녀는 특유의 거칠고 가슴을 울리는 화법으로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귀족들 보다는 그들에게  이해받는 예술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이 시절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농민전쟁을 기록한 농민전쟁 연작들과,
방직공의 봉기 등이 있겠는데,
이러한  작품의 성격때문에 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농민전쟁 연작 중 1907년

아마도 그런  그녀의 성향으로 미루어 보건데,
국가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던듯 하여,
20세기 초 무책임하게 전쟁에의 참여를 종용하는 선생들과 주변에 선동된
열여덟살 먹은 둘째 아들 페터가
1차대전에 지원하겠다고 하였을 때도
당연하게 여겼던듯 합니다.
오히려 남편인 칼 이 아들의 종군을 말리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는군요.
그에 고무되어 덩달아 큰아들까지 전쟁에 나가는데요.
그녀는 1914년에 정부로 부터
" 당신의 아들은 전사하였습니다. "
라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페터가 죽은 것입니다.

그 전부터 그녀의 내면에 있어왔을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 하는 것과, 
내 목숨이 사라지면 도대체 그게 무슨 소용..?
이라는 갈등이 자신의 소중한 아들을 잃음으로써
한 쪽으로 기울어 지기라도 하듯
이 무렵 부터 그녀의 그림들은.
엄마를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하는 작업이 많아집니다.

                                                                                                                 죽음의부름 1934년

나찌의 등장으로 그녀의 말년은 행복하지 못했고,
죽은 페터의 이름을 받은 큰 아들 한스의 아들인 페터마저 2차 대전에서 전사합니다.

위의 피에타는 그녀가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무렵인 1938년 즈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어떤 힘에도, 그 누구에게도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그를 부둥켜 안고 웅크리고 앉은 어머니는 바로 그녀의 모습이겠습니다.

훔볼트 대학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조 건물은 1818년 Karl Friedrich Schinkel 이 지었고,
1993년에 케테콜비츠의 조각,  "어머니와 죽은 아들 (Mutter mit totem Sohn)“ 을 안치하여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기념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건물 안에는 조각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조명조차 없습니다.
길거리와  비슷한 바닥에 천정에는 구멍이 뚫려있어, 
겨울날 진눈깨비나 눈이라도 오면 그 처연함이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천정의 구멍은
희생당한  영혼들이  하늘로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녀의  그림들을 썩 좋아 하는 편이 아닌 나도
이 작품을 보고는 가슴에 뭔가가 울리는 듯 했는데,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피에타.. (PIETA) 라는 보편의 감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활기차고 화려한 베를린의 번화가 운터 덴 린덴 (Unter den  Linden)을 거닐다가,
혹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생각나시면,
한 번쯤 들러, 
전쟁에, 폭력에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과,
그 희생자들을 한번 쯤 생각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베를린에는 그녀의 미술관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별 일이 없는 한 그곳에 가지는 않을것 같은데요. ^^;;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http://www.kaethe-kollwitz.de/
에 가시면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아실수 있겠습니다.